갈 데 없으면 시집오라던 남편과 42년…
이제는 만인을 위해 살 때라고 생각해요.
결혼식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1981년 봉천동 중앙교회 교육관에서 결혼했어요. 저는 웨딩드레스가 아닌 원피스를 입고 결혼했죠. 비용 문제도 있었지만, 당시 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격식 때문에 결혼식을 못 하고 동거를 선택하던 시절이었어요. 우리는 격식 없이도 평상복으로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리고 아버지가 아닌 남편과 손을 맞잡고 입장했는데, 이건 남녀평등과 가정 내 민주화의 상징이었어요. 결혼식이 끝난 후 보니 전경차 5대가 대기하고 있더라고요. 당국은 결혼식을 빙자한 시위를 우려했던 거죠.
신혼집은 어땠나요?
신혼집이 아니라 신혼 방이었어요. 주택에 딸린 단칸방인데 겨울에 너무 추워서 우리 딸이 태어났을 때 손에 동상이 걸렸고, 걸레를 놓아두면 꽁꽁 얼어버렸어요. 신혼여행은 시댁이 있는 영천으로 갔어요. 산소에 가서 절 올리고 경주 구경하고 신혼 방으로 돌아왔죠. 방에 들어가니 우리 이불 속에서 누가 자고 있는 거예요. 꿈틀꿈틀하면서 어떤 남자가 나오는데 너무 놀랐어요. 알고 보니 수배자였는데, 남편이 우리가 신혼여행 가는 동안 노동운동을 하는 후배를 숨겨준 거였죠. 부스스한 모습의 낯선 남자가 이불 속에서 나오는 걸 보고 정말 경악했어요.(웃음)
결혼하고 40여 년이 지났는데, 부부 관계를 오랫동안 잘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생각이 같았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했죠. 물론 경상도 남자라서 약간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면이 있었어요. 그래서 늘 지적했죠. “당신이 정말 혁명을 얘기하고 여성해방을 말하는 사람이 맞느냐, 말로는 그런데 왜 가정 내에서는 실행이 안 되느냐”고요. 그러면 남편은 지적을 잘 받아들였어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와서 몰랐었고 몸에 배었다. 고치겠다”고 했죠. 말로만 한 게 아니라 제가 지적한 건 금방금방 고쳤어요.
설난영 여사가 지켜본 김문수 후보는 어떤 사람인가요?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남편은 늘 저를 아껴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런 것들을 굉장히 명쾌하게 해결해주죠. 집안일도 도와주려고 많이 노력했고요. 100점 만점에 75~80점 정도? 만점을 주고 싶은데 그러면 사람들이 너무 띄워준다고 할 것 같아서요.(웃음)
김문수 후보는 재테크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입니다. 실제는 어떤가요?
국회의원 시절에는 월급을 받아도 직원들 밥 사주고 나면 남는 게 없었어요. 빚 안 지고 산 게 다행이죠. 봉천동에 20평대 작은 아파트가 있었는데, 부천으로 공천받아 이사 가면서 팔았어요. 그 돈으로 부천에 32평대 아파트를 샀죠. 그 집을 갖고 있다가 수성구 선거 출마할 때 다시 팔았어요. 재테크나 돈과는 거리가 먼 게 당선돼서 집을 구하려고 하면 집값이 오를 때고 팔아야 할 때는 집값이 떨어질 때였어요. 공천, 당선 때문에 새로운 집을 구할 때면 계속 손해를 봤죠. 서울로 다시 올 때 4억대로 관악산 중턱에 있는 이 집을 샀어요.
도지사 시절 딸 결혼식을 알리지 않은 게 뒤늦게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남편이 도지사였기 때문에 딸이 결혼한다고 하면 공무원들부터 시작해 주변 많은 분이 부담을 가질 수 있잖아요. 공직자 가족으로서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우리 식구와 사돈네 가족만 모여 여주의 한 음식점에서 소박하게 치렀어요. 100명도 안 되는 손님에 대부분 친인척들뿐이었죠.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몽준 의원 부부가 갑자기 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알고 보니 사돈이 울산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했는데, 정 의원의 지역구가 울산이다 보니 어찌어찌 소식을 들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결혼식을 원피스 입고 소박하게 했던 것처럼 딸 결혼식도 스몰 웨딩으로 했네요. 대를 이은 셈이죠.
도지사 시절인데 좋은 자리에서 혼담 같은 게 오지는 않았나요?
사실 도지사 시절에는 혼담이 많이 들어왔어요. 고위 공직자들도 그렇고 좋은 가문에서 여러 제안이 있었지만 딸이 그런 걸 굉장히 싫어했어요. 딸은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과에 진학해 그곳에서 같은 과 남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어요. 사회복지사 둘이 제대로 먹고살 수 있을지 걱정도 됐지만, 본인들이 좋아하니 어떡하겠어요? 남편도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하면 되는 거지 뭐가 문제냐”며 흔쾌히 결혼을 허락했고요. 이제 사위가 아들 같아요. 요즘은 남편 선거운동 도와주려고 자원봉사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겪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특히 한덕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때 기분이 어땠나요?
남편이 최종 후보로 선출됐는데 하루아침에 뒤집어져 무효가 됐어요. 실감이 안 났죠. ‘이게 가능한가?’ 싶었어요. 실제로는 저희가 경선에 임하기 전부터 이미 각본이 다 짜여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도 “끝까지 가야 된다. 중간에 자존심 때문에 던져버린다면 국민들을 저버리는 일이다”라는 얘기를 나눴어요. 결국 당원들의 선택을 통해 후보로 확정돼 이렇게 선거 운동에 나설 수 있게 됐죠.
영부인으로서 롤 모델이 있으신가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는 한 번도 비난을 받거나 튀지 않고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그때와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런 모습에 현대적인 요소를 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선 승리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시나요?
필승!(웃음)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10년 뒤 두 분이 어떤 모습으로 지낼 것 같으신가요?
저희는 지금까지 너무 급변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마지막 부부 동반으로 해외를 간 게 도지사로 일하러 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었어요. 그 이전에는 약 30년 전인 15대 국회 때 일본에서 의원들을 초청해 방문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는 시간을 갖고 여유 있게 일상을 즐기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요. 여행도 다니고, 안정된 사회에서 평화를 누리면서 일상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약 3년 전 남편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과 고용노동부 장관을 맡았을 때가 좋았어요. 월급 받으면서 생활하고, 이전에 못 했던 가족 모임도 하고, 손주들에게 요리도 해주고요. 제 일상 중에서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어요. 그 일상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또 이렇게 됐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