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행을 택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서울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인생을 살아오신 산증인이기도 하죠. 도시에서의 척박함과 고단함에 지치셨는지 아빠와 조용한 곳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며 제주로 내려가셨어요. 하지만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제주의 삶을 시작하던 첫날, 아빠가 그곳에서 갑자기 돌아가셨으니까요. 예고되지 않았던, 인생의 내리막길 같은 그래프에 엄마는 길을 잃으신 듯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 저는 제주라는 곳을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곧 5월이 다가옵니다. 엄마가 제주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신 지도 어느덧 5년이 되어가네요.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뒤 3년 후 다시 제주행을 택하셨습니다. 어쩌면 아빠의 마지막 삶이 있었던, 함께 행복한 생활을 꿈꿨던 그곳이 엄마의 최선의 선택지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그곳에서 엄마는 행복합니다. 제주 사람이 다 된 듯 까맣게 탄 얼굴과 오름 등반의 영광 도장들. 58년생 개띠 엄마와 82년생 개띠 딸은 이렇게 서울에서도, 제주에서도 소랑햄수다.
딸 신주영 ♥ 엄마 이서우
엄마의 진주 귀고리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대사처럼 대학 졸업 후 취업 시험을 보거나 면접을 볼 때 제가 긴장을 하면 “넌 다 잘해. 그러니까 괜찮아.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응원해주셨던 어머니. 그 덕분에 저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했고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받은 첫 월급으로 어머니에게 진주 귀고리·목걸이·반지 세트를 선물했어요. 여러 층의 자극과 시간이 더해져 진주가 완성되듯 이런 과정과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과 지혜가 닮은 것 같아 감사의 의미로 선물했답니다.
어머니는 딸이 고생해서 받은 월급으로 샀다고 눈물의 보석이라며 눈물을 보이셨어요. 딸의 첫 월급 선물을 아끼느라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만 착용하고 행여나 잃어버릴까 봐 손수건으로 감싸서 늘 쌀통에 넣어 보관했어요. 뮤지컬을 보러 가던 이날도 제가 선물한 진주를 착용하셨네요. 70대 후반이 되시고 나서 더 연로해지면 어디에 두었는지 못 찾을 수도 있다며 얼마 전에 제게 진주를 물려주셨어요. 제가 가진 그 어떤 보석보다 귀한 히스토리가 담긴 보석이에요. 어머니를 생각하며 곱게 하다 훗날 제 딸에게 물려줄 거예요.
딸 박빛나 ♥ 엄마 김민선
“시어머니는 제 손을 꼭 잡고 그릇 가게로 데려가시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어요.‘원래 딸이 시집 갈 때 엄마가 혼수 그릇을 해주는 거야.너는 내 딸이니까 내가 그릇 해줄게.’그 순간 저는 눈물이 쏟아졌죠.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거든요”
남편의 어머니를 넘어 친엄마 이상의 존재
저는 어릴 적 부모님과 떨어져 고모 집에서 자랐어요. 부모님과 함께한 시간이 짧았던 제게 ‘가족’이라는 단어는 멀게만 느껴졌죠. 결혼 후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됐을 때,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지만 그 두려움은 기우였고, 시어머니는 저를 사랑으로 품어주셨죠. 결혼을 앞둔 어느 날의 기억은 지금도 제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제 손을 꼭 잡고 그릇 가게로 데려가시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원래 딸이 시집 갈 때 엄마가 혼수 그릇을 해주는 거야. 너는 내 딸이니까 내가 그릇 해줄게.” 그 순간 저는 눈물이 쏟아졌죠.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거든요. 시어머니의 손길은 제 삶 속에 처음으로 스며든 ‘엄마의 사랑’이었어요. 10년 동안 함께 살며 우리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됐습니다. 신기하게도 외모까지 똑 닮은 우리를 사람들은 친정엄마와 딸로 착각하곤 해요. 가족이란 무엇인지, 사랑이 가진 힘이 얼마나 큰지 시어머니를 통해 배웠어요. 그리고 오늘도 당신이 고른 그릇에 음식을 담으며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깁니다.
딸 김이영 ♥ 엄마 현금자
우리 경자 씨를 소개합니다
무려 30년 전 사진인데, 지금 봐도 최근에 결혼한 사진 같지 않나요? 엄마는 강원도 횡성에서 알아주는 미녀였어요. 아직까지 엄마의 위엄이 횡성에서는 들린답니다.(웃음) 새하얀 얼굴에 큰 눈과 착한 마음씨, 누가 봐도 연예인 같지 않나요? 엄마는 친구가 신청했던 오디션에 합격해 연예인의 길을 갈 뻔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결국 횡성의 경자로만 남았다고 해요. 30년 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미모가 눈부신 우리 엄마. 예쁜 드레스에 제 유치원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부케까지!
“너는 할 수 있어”라고 항상 용기를 주신 우리 엄마,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그 희생을 몰랐는데요, 어떻게 감히 입에 올릴 수 있겠어요. 제게 살아갈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있는 건 바로 엄마의 교육 덕분이었어요. ‘애순’보다 꿈이 많았던 엄마의 삶은 고운 손에 물집이 잡힐 만큼 일해서 이제는 주름진 손과 얼굴이 엄마의 삶을 대변해주네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눈물이 많이 흘렀던 건 우리 엄마의 삶이 애순이보다 더 험난했던 이유에서였을 거예요. ‘관식’ 같은 남편을 만났으면 좋았을 우리 엄마, 60이 넘은 지금에야 황혼의 시간을 걷는 당신이 행복한 꽃길만 걸어가시길 응원합니다.
딸 박은아 ♥ 엄마 권경자
내 인생의 여행 메이트
엄마와 함께한 여행을 추억하다 보면 손에 꼽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부모님을 모시고 홍콩 여행을 다녀왔는데 저희 엄마도 전형적인 엄마더군요.(웃음) “여기 앉아 있을 테니 보고 와~”, “음식이 입에 안 맞네”, “비싸다” 등 귀여운 푸념을 늘어놓으시더라고요. 그럼에도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은 참 멋진 추억으로 기억돼요. 한번은 해외여행 티케팅을 하다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어요. 경유지에서 하차하고 다시 티켓을 받아 이동해야 했는데 서툴러서 제가 놓쳐버린 거예요. 공항에서 엄마와 몇 시간 노숙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또 한번은 부산에 애견 호텔이 생겼다는 소식에 엄마와 놀러 갔죠. 드라이브도 하고, 바닷가 구경도 하고, 이자카야에 들러 생선 요리를 먹고 사케를 마시며 어렸을 적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눴어요. 엄마가 좀 더 건강하셔서 또 다른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엄마! 나랑 같이 못 가본 여행지가 너무 많잖아요. 우리 같이 운동하고 건강을 유지해 오래도록 즐거운 여행 다녀요.”
딸 리안 ♥ 엄마 박정숙
도시락 속 엄마의 편지
3남 1녀로 태어나 살림 밑천으로 큰 우리 엄마. 결혼해서는 시부모님 모시고 시누이, 시동생 시집 장가 보내면서 딸 셋을 키우셨어요. 일도 하고, 시부모님을 모시면서도 딸들 등하교는 항상 함께해주셨습니다. 하굣길에 즐거웠던 일, 속상했던 일, 엄마한테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사춘기가 와서 마음이 많이 힘들었을 때 ‘내가 힘들게 하면 엄마가 더 속상하겠지? 내가 못되게 말하면 우리 엄마는 기댈 곳이 없겠지?’ 생각하며 온 힘을 다해 마음을 꾹꾹 눌렀어요. 그런데 엄마가 어떻게 아셨는지 매일 도시락에 편지를 써넣어주셨는데, “엄마는 우리 딸 존재만으로도 힘이 나. 하고 싶은 거 다 해. 울고 싶을 땐 울고, 기대고 싶을 땐 기대도 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매일 받은 편지 덕분인지 힘든 마음은 어느새 풀어져 있었어요.
처음 엄마 품을 떠나 독립했을 때 매일같이 안부를 묻는 엄마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울 때도 때가 되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바리바리 싸서 올라와 숨 쉴 틈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날 살게 해줘놓고 전화를 하면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전화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요.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고 엄마를 돌아보니 가족만 챙기느라 제대로 꽃 한번 피우지 못한 엄마가 보입니다. 소소하지만 엄마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 사연을 보냅니다.
딸 이연경 ♥ 엄마 김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