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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초년생과 손목시계

쓰고 싶은 마음과 쓸 돈이 정해진 현실 사이에서.

UpdatedOn November 0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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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꽤 좋은 직업의 사회 초년생들에게 강연한 적이 있다. 주제가 기묘했다. ‘사회 초년생이 가져야 할 겸허한 자세’.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으로 내가 선정된 이유는 ‘다양한 경험을 한 라이프스타일 잡지 에디터라서’였다. 모호한 이야기를 한 시간이나 해야 했으니 나는 ‘나중에 퇴사하고 싶어도 잘 참고 잘 다녀라’라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겨우 시간을 채우고 질문을 받았다. 앞자리 학생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사회 초년생이 무슨 시계나 지갑을 사면 되나요?” 그때 깨달았다. 내내 이런 이야기나 할걸.

사회 초년생의 손목시계를 고를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내 일에서 손목시계가 필요한지 아닌지’다. 인터넷에서 흔히 떠도는 무슨 시계가 좋냐, 얼마까지 써야 하냐 같은 이야기는 내 생각엔 본론에서 벗어난 질문이다. 일단 지금은 모두가 정확도 100%의 디지털 회중시계인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닌다. 이런 상황에서 손목에 감는 시간 표시 기구인 손목시계를 사야 하는가? 이 질문을 선행해야 한다.

경험상 손목시계가 필요한 직군이 몇 가지 있다. 미팅이 잦은 사무직이라면 바늘 있는 손목시계가 가끔 유용하다. 시각을 확인해야겠는데 대놓고 시계를 보자니 눈치가 보일 때는 바늘 시계를 힐끗 확인하는 게 의외로 도움이 된다. 구형 디지털시계는 반사 각도에 따라 시간이 안 보이고 스마트워치는 발광체라 일반 손목시계보다 존재감이 더 크다. 시침이 두 개 있는 월드타이머는 해외 영업 등 해외 시간대를 늘 숙지해야 할 때 생각 이상으로 유용하다. 언제든 두 곳의 시간대를 동시에 확인할 수 있으니까. 이 정도가 아니라면 요즘 사회 초년생에게 손목시계의 쓸모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에게 솔직해져라. 시계를 사고 싶은 건가, 사회인이 되었으니 돈을 한번 시원하게 쓰고 싶은 건가. 두 가지 욕구를 혼동하면 이제부터 피곤해지거나 마음에 차지 않는 시계에 돈을 쓰고 후회하기 십상이다. 손목시계가 자랑하는 여러 가지 기능은 도시 직장인에게 거의 쓸모가 없다. 학생 때 쓰던 스마트워치나 군대에서 쓰던 튼튼한 손목시계로도 충분하다. 여러분의 삶과 200m 방수가 무슨 상관이 있나.

시계를 좋아하던 사람이 사회인이 되어 특별한 나만의 시계를 사고 싶을 수 있다. 그런 분이라면 형편에 맞는 가격대의 시계를 사시라. 스와치도 좋고 세이코의 최저가도 좋다. 어차피 손목시계 기능은 상향평준화되었으니, 지금 내 소득수준에 맞춰 마음 편하게 찰 수 있는 시계가 가장 좋은 시계다. 아울러 저렴한 시계의 또 다른 장점은 높은 환금성이다. 비슷한 상황의 빠듯한 친구들이 중고 시계로 눈을 돌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저렴한 걸 사서 간직해도 좋고 조금 차다가 팔아도 된다. 사회 초년생이 무리해서 고가 시계 찬다고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초년생도 있을 수 있다. 능력이 출중하든 가문이 출중하든 가처분소득이 꽤 될 수 있다. 그런 친구들이 사회 진출을 계기로 고가품을 하나 더 사고 싶어졌다면, 대놓고 비싸거나 너무 튀는 건 사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요소로 튀어도 딱히 좋을 게 없다. 젊은 사람이 사용하는 터무니없는 고가품은 어쩔 수 없이 오해나 위화감을 부른다. 한 번은 어느 지방 도시의 고속버스 티켓 창구에서 플래티넘 요트마스터를 차고 내게 티켓을 주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가짜 혹은 터미널 주인 아들. 둘 중 뭐든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 커뮤니티 보지 마라. 커뮤니티 등을 보고 시계처럼 값비싼 물건을 사지 마라. ID로만 존재하는, 자기가 하는 말에 최소한의 책임도 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에 왜 넘어가나. 그럼 뭘 보냐고? 매체를 봐야지. <아레나>도 좋고, <크로노스>나 <타임포럼> 같은 전문 매체도 좋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음은 잘 알고 있다. 스스로가 완벽하지 않음을 아는 게 매체의 가장 큰 장점이다. 매체는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다. 아무 말이나 써놓고 ‘아님 말고’라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손목시계는 시간을 확인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삶을 즐기는 여러 방법 중 하나다. 손목시계는 누군가가 열심히 만들어낸 정밀한 물건이다. 열심히 만들어낸 정밀한 물건을 이리저리 들여다볼 때 특유의 감흥은 확실히 있다. 이 작은 물건 안에 들어 있는 여러 요소를 보는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무엇을 보든 한층 섬세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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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박찬용

202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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