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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안식, 에디터들의 솔 푸드

당신의 영혼에 안식을 주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삶의 허기를 채우고 따스한 위안을 주는 에디터들의 솔 푸드.

On February 1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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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끈한 맛

내 인생은 매운 음식을 제외하고 논할 수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시절 엄마가 차려주는 건강하고 담백한 음식만 먹고 살았으며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아기 입맛’인데도 주기적으로 빨간 빛깔의 매콤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불치병에 걸려 있다. 골똘히 생각해보니 부모님 품을 떠나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룸메이트들과 밤마다 학교 근처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그중 매운 떡볶이와 치킨에 눈뜨게 됐다. 처음에는 매운 음식이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지만 점차 그 화끈한 맛에 길들여졌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야근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동료들과 매운 음식을 먹으며 풀었다. 그사이 세상에는 매콤한 음식이 더욱 다양해졌다. 불닭볶음면을 시작으로 마라탕, 매운 갈비, 매운 주꾸미 등등 웬만한 음식에는 극도로 매운맛이 추가된 것. 덕분에 매운 먹거리에 대한 화끈한 도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최근에도 친한 지인과 매운 음식을 먹고 싶다며 급만남을 주선해 얼큰한 김치우동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는데 어찌나 술이 술술 들어가던지. 매운 음식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최고의 술안주라는 것이다. 쓰디쓴 술 한 모금을 들이켜고 매콤한 안주를 씹어 삼키면 엔도르핀이 분비되며 그날 하루의 고생이 싹 잊히는 기분이다. “힘내”, “잘될 거야”라는 상투적인 위로보다 한 그릇의 김치우동이 더 훌륭한 위안이 됐다.

글을 써 내려가며 돌이켜보니 내가 매운 음식을 찾을 때는 대부분 스트레스를 받은 상황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나와 함께 매운 음식을 먹었던 친구들과 지인들 모두 그랬다. 매콤한 치킨을 뜯으며 그날 하루의 고생담을 늘어놓기도 하고, 마라탕 국물을 들이켜며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들에 대한 진지한 토론도 했다. 매운 음식을 먹고 나면 신진대사가 활발해져 체온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와 내 지인들은 매운 음식을 먹기도 전에 이미 잔뜩 열이 오른 상태였다가 희한하게도 매운 음식을 모두 비우고 나면 이성을 되찾고 차분해졌다. 먹고 난 후 서로의 얼굴에 개운한 미소가 번져 있었으니 행복해한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나와 내 지인들이 매콤한 음식을 찾는 빈도가 줄어들면, 화끈한 맛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나의 솔 푸드였던 매운 음식들에 안녕을 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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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사랑 나라 사랑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도 배가 불러야 흥이 난다. 그래서 내게 밥이 필요하다.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인간 욕구 5단계 이론을 세우는 데 표본이 필요했다면 내가 적합할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이론에서 가장 기초적인 욕구로 분류되는 먹고, 자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분석한 결과 난 잠을 푹 자고 배가 든든해야 에너지가 생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매일 밤 12시엔 잠자리에 눕고 아침과 저녁은 거르더라도 점심만은 꼭 챙겨 먹으려 한다.

세상에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은 무궁무진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밥이다. 면이나 빵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매주 월요일 저녁 고정 식단으로 불닭볶음면과 맥주 한 캔을 먹는 의지의 한국인이고, 날고 뛰는 여성호르몬의 영향을 받을 때는 생크림이 가득 올려진 빵을 즐긴다. 그렇게 잠시 외도(?)를 하지만 역시나 밥만 한 게 없다. 밥을 먹어야 든든한 배의 힘으로 퇴근 시간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밥은 비빔밥, 볶음밥, 주먹밥도 아니고 순수한 쌀밥 그 자체다. 스케줄이 바쁘거나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귀찮을 땐 별다른 반찬 없이 흰쌀밥에 물을 말아 먹거나 누룽지를 끓여 먹기만 해도 에너지가 1% 상승하는 기분이다. 매일 경주마처럼 불타는 밤을 보냈던 20대 시절에도 나는 소주 한잔을 들이켜기 전, 밥 한 공기를 먹곤 했다. 친구들은 안주로 나온 각종 탕에 밥을 말아 먹는 나를 보고 질색했지만 휴대폰 배터리가 충전되듯 100% 완전 충전된 나의 밥심은 동틀 때까지 이어졌던 숱한 술자리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됐다.

<우먼센스> 취재팀은 나의 깊디깊은 밥 사랑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솔 푸드’라는 주제에 사과라고 답하는 오류를 범하자 모두 입을 모아 “너의 솔 푸드는 밥”이라고 정정해줬을 정도.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함께하는 취재팀에게 나는 매일 오전 11시 30분 구내식당의 식단을 전달한다. 내 나이만큼 오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구내식당은 ‘엄마가 해준 밥’에 대한 그리움을 대리만족시키는 귀한 곳이다. 고슬고슬한 쌀밥에 각종 밑반찬으로 구성된 구내식당표 한 끼를 먹고 나면 그 어떤 때보다 맑은 정신이 된다. 매일 아침 마시는 아메리카노와 같은 존재감이랄까?

어쨌든 나는 취재팀 중 유일하게 홀로 밥 한 공기를 다 먹는다. 본의 아니게 먹성을 자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이다. 내 인생에서 최고로 다이어트를 열심히 했던 30살 무렵에도 밥만큼은 포기하지 못했다. 밥을 포기했다면 조금 더 살을 뺄 수 있었겠지만 “맛있게 먹고 더 움직일 거야”라며 열심히 밥을 먹었던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 일은 장담할 수 없다지만) 나의 밥 사랑은 영원할 것 같다. 나에게 밥은 보약이다.

CREDIT INFO

에디터
문하경, 김지은
일러스트
킨주리
2022년 02월호

2022년 02월호

에디터
문하경, 김지은
일러스트
킨주리